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루노 발터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876년 9월 15일에 [[베를린]]에서 태어났다. [[유대인]] 출신으로, 원래 성은 '슐레징어'였다. 같은 유대인이며,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[[구스타프 말러]]의 조언으로 1896년 [[가톨릭]]으로 개종하며 '브루노 발터'로 이름을 바꾸었다. [[베를린]]의 슈테른 음악원(현재 베를린 예술대학교)에서 공부했고, 이후 [[쾰른]], [[함부르크]] 등 독일 각지의 가극장에서 일하였다. 그러던 중 18세였던 1894년 말러와 만나게 되었다. 이후 말러의 영향에 의한 인기상승도 곁들여서 점차로 두각을 나타내고, 1901년부터 1912년까지 빈 국립가극장 등에서 지휘자로 활동 했다. 1911년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|오스트리아]] 시민권도 가지게 되었다. 1913년 유서 깊은 [[뮌헨]]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. 이후 1925년 베를린 시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어 당시 세계 음악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에서 [[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]]의 [[빌헬름 푸르트벵글러]], 베를린 국립 가극장의 [[에리히 클라이버]], 베를린 크롤 가극장의 오토 클렘페러와 경쟁하며 활발히 활동했다. 1929년에는 푸르트벵글러를 이어 [[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]]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였다. 그러나 1933년 [[나치당]]이 집권하자 압박을 받고 1934년부터는 [[파리(프랑스)|파리]], [[런던]] 등에서 활약하게 되었고 특히 때마침 본인이 젊은 시절부터 활동했던 [[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]]의 상임지휘자가 공석이 되자, 악단의 실질적인 수장이 되어 이끌었고, 아울러 [[잘츠부르크]] 페스티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. 그러나 1938년 [[나치 독일]]이 [[오스트리아 연방국|오스트리아]]를 [[오스트리아 병합|합병]]하자 발터는 스승이었던 [[구스타프 말러]]의 [[교향곡 제9번(말러)|교향곡 9번]]을 연주하는 것을 끝으로 빈 필을 떠나게 되었고,[* 당시 공연 실황은 녹음되어 '''2차 대전 전에''' 음반으로 발매되었고, 유튜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.] 이후 1939년 [[제2차 세계대전]]이 발발하자 미국에 정착하여 [[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]]를 중심으로 활동했다.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빈 필하모닉을 비롯하여 유럽에서 그의 객연(客演) 요구가 높았지만 고령으로 인해 제한적으로 빈 필과 베를린 필 등을 객원 지휘했을 뿐, 음악 팬들이 바랐던 빈 필하모닉에의 객연에 의한 녹음을 실현하지 못했다. 브루노 발터는 미국에서 기후가 온화한 [[캘리포니아]]주 [[비벌리힐즈]]에 정착했고, 그가 주로 지휘했던 뉴욕 필은 비행기로 왕래하며 지휘했다. 그는 전후에도 제한적인 유럽 객연을 지휘하면 주로 뉴욕 필과 연주 활동을 이어갔지만 70세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[[뉴욕]]까지 왕래가 힘에 부치게 되자 1950년대 중반 지휘계에서 은퇴했다. 하지만 컬럼비아 레코드사가 그에게 음반 녹음을 줄기차게 제의했고, 브루노 발터는 이제는 뉴욕까지 갈 여력이 없다면서 이를 거절했지만,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터를 위해 LA에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라는 오케스트라까지 창단하는 근성을 발휘하자 결국 발터는 이를 수락했다. 덕분에 1958년부터 발터는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당시 막 도입된 스테레오 음질로 여러 음반을 남기게 되었다. 1962년 2월 17일에 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스의 자택에서 86세로 사망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